우리가 공간에 느끼는 정체성 - 장소성과 비장소성

물리적인 공간은 단순히 건축물이나 구조물의 집합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머무는 장소는 기억을 담고,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배경이 됩니다. 반면, 오늘날의 도시를 구성하는 수많은 공간들은 우리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다양한 공간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공간은 우리에게 깊은 소속감과 정체성을 부여하는 반면, 또 다른 공간들은 익명성과 일시적 경험만을 제공합니다. 

이 블로그에서는 장소와 비장소의 개념을 통해 초현대성 시대에 공간이 우리의 정체성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봅니다.


Jim-ouk




Marc Augé와 비장소non-place 개념의 이해

학문적 배경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Marc Augé는 현대 공간과 문화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인류학 분야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비장소' 개념 탄생

1992년 출판된 '비장소non-place: 초현대성의 인류학 개론'에서 오제는 처음으로 '비장소non-place' 개념을 소개했습니다.

장소와 비장소의 대비

오제는 역사성, 관계성, 정체성을 가진 '장소'와 달리, '비장소'는 이러한 특성이 결여된 균질적이고 표준화된 공간임을 설명했습니다.

초현대성의 표현

비장소는 단순한 공간 개념을 넘어 초현대성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반영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전통적 '장소'의 특성과 의미

역사성

전통적 장소는 시간의 흐름과 역사적 사건의 축적을 통해 형성되며, 이는 공간에 깊이와 의미를 부여합니다.

관계성

장소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정의되며, 사람들 간의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정체성

장소는 개인과 공동체에게 특별한 정체성과 소속감을 제공하며, 이는 문화적 기억의 일부가 됩니다.

고유성

각 장소는 고유한 특성과 분위기를 가지며, 다른 곳과 구별되는 독특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Cheungyin




현대 도시의 '비장소' 사례 분석

공항과 기차역

세계 어디서나 유사한 디자인 언어를 사용하는 공항과 기차역은 위치에 관계없이 동일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공간에서는 지역적 특성보다 효율성과 기능성이 중시됩니다.

쇼핑몰과 브랜드 매장

글로벌 브랜드 매장과 쇼핑몰은 세계 어디서나 동일한 인테리어, 제품 배치, 서비스 경험을 제공합니다. 이곳에서 소비자는 지역성보다는 브랜드의 세계관을 경험합니다.

체인 카페

스타벅스와 같은 체인 카페는 지역에 상관없이 동일한 메뉴, 인테리어, 배경 음악을 제공합니다. 고객들은 익숙함을 위해 이러한 표준화된 경험을 찾습니다.



비장소에서의 인간 경험과 심리

익명성과 일시적 정체성

비장소에서 사람들은 '승객', '고객', '사용자'와 같은 일시적이고 기능적인 정체성을 부여받습니다. 개인의 고유한 특성은 중요하지 않으며, 정해진 규칙과 역할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깊은 상호작용 없이 익명성 속에서 움직이며, 이는 종종 소외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소외와 단절감

비장소의 표준화된 환경에서 많은 이들은 역설적으로 군중 속 고독을 경험합니다. 물리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깊은 단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적 경험은 현대인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치며, 소속감에 대한 새로운 갈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Martin-sanchez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비장소들

메타버스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가상 비장소

소셜미디어

모두에게 동일한 인터페이스의 디지털 공간

온라인 쇼핑몰

실제 매장 경험을 대체하는 가상 소비 공간

화상회의 플랫폼

어디에도 없는 디지털 회의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물리적 공간을 넘어 새로운 형태의 비장소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상 비장소들은 전통적인 비장소의 특성인 표준화, 익명성, 일시성을 더욱 강화하면서도, 시공간의 제약을 완전히 초월한다는 점에서 고유한 특성을 가집니다.

특히 팬데믹 이후 이러한 디지털 비장소에서 보내는 시간이 급증하면서, 우리의 정체성과 관계 형성 방식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공간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이 모순적 경험은 현대인의 새로운 실존 조건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장소와 비장소의 경계 사례들

테마파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장소성'을 판매하는 공간

젠트리피케이션 지역

지역성의 상업화와 표준화된 소비 경험의 충돌

에어비앤비

낯선 이의 '집'이라는 모순적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

현대 사회에는 전통적인 장소와 비장소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계적 공간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간들은 장소의 특성인 정체성, 역사성, 관계성을 의도적으로 모방하거나 상품화하면서도, 비장소적 특성인 표준화와 일시성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관광 산업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진정성의 연출'은 이러한 경계적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전통적 장소가 관광객을 위해 재구성되거나, 완전히 새로운 전통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장소와 비장소의 경계는 점점 더 불분명해지고 있습니다.


Jesse-hammer



비장소에 대한 대안적 접근법

공간의 인간화

비장소에 지역 예술가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지역 커뮤니티의 이야기를 반영하는 디자인 요소를 도입하는 등 인간적 차원을 추가하는 접근법입니다. 이를 통해 표준화된 공간에 고유한 정체성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커뮤니티 중심 공간

공항이나 쇼핑몰과 같은 비장소에 지역 주민들이 모이고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단순한 통과 공간에서 관계가 형성되는 장소로 변화시키는 시도입니다. 이는 비장소의 기능성을 유지하면서도 장소적 특성을 더하는 방법입니다.

사용자 참여형 디자인

공간의 설계와 운영 과정에 사용자들이 직접 참여하도록 하여, 공간에 대한 주인의식과 소속감을 높이는 접근법입니다. 이는 하향식으로 계획된 비장소에 상향식 요소를 도입하여 공간의 민주화를 추구합니다.



한국적 맥락에서의 장소성과 비장소성

한국은 압축적 근대화와 급속한 도시화 과정을 거치며 전통적 장소성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불과 수십 년 만에 농촌 사회에서 초현대적 도시 사회로 전환되면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경험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서울역, 강남역, 인천공항과 같은 한국의 대표적 비장소들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글로벌 표준을 따르면서도, 빠른 속도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한국적 특성을 함께 보여줍니다. 

특히 편의점, 프랜차이즈 카페, 대형 쇼핑몰과 같은 현대적 비장소가 전통 시장이나 동네 상점을 빠르게 대체하면서, 젊은 세대들은 장소보다 비장소에서의 경험에 더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비장소 속에서 장소성을 되찾는 방법

하지만 모든 공항이, 모든 쇼핑몰이 비장소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제 또한 비장소와 장소는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스펙트럼 위에 존재한다고 봅니다. 즉, 비장소 속에서도 장소성이 생성될 수 있으며, 이는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위와 경험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예컨대 어떤 공항 라운지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는 암묵적 연대감, 쇼핑몰에서 열린 지역 축제, 브랜드 매장이 로컬 아티스트와 협업하여 지역색을 드러내는 경우 등은 비장소가 장소로 변모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건축가나 디자이너, 브랜드 기획자들은 이 과도기적 속성을 이해하고, 물리적 구조뿐만 아니라 사회적 맥락, 사용자 경험, 기억의 층위를 설계에 포함함으로써 공간을 다시 ‘장소’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Wu-yi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장소를 통해 기억하고, 그 기억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어떤 골목을 지나칠 때 떠오르는 냄새,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 나눈 대화, 어린 시절 자주 갔던 문방구의 분위기—all of these are place-bound memories. 반면 비장소는 그런 감각을 제거하고, 인간의 내러티브를 상실시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점점 더 비장소화되는 도시 구조 안에서도, 장소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역 커뮤니티 공간의 복원, 공공 디자인의 재해석, 로컬리티를 강조한 건축 설계 등은 인간 중심의 공간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 장소성은 공간 그 자체보다는 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 행위, 감정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공간에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을 때, 비장소도 다시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미래의 공간과 정체성

초연결 공간

물리적 장소와 디지털 비장소가 융합된 혼합 현실 경험의 확산

포스트 팬데믹

안전과 거리두기를 고려한 새로운 공간 설계의 필요성 대두

기술 혁신

AI와 사물인터넷이 만드는 지능형 환경과 개인화된 공간 경험

정체성 재구성

다중적이고 유동적인 장소 경험을 통한 새로운 정체성 형성

미래의 공간 경험은 물리적 장소와 디지털 비장소의 경계가 더욱 모호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증강현실과 가상현실 기술의 발전은 우리가 동시에 여러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며, 이는 정체성 형성에도 새로운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인간의 본질적 욕구인 소속감과 의미 있는 관계에 대한 갈망은 계속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미래의 공간 설계와 경험에서는 기술적 효율성과 함께 인간적 가치와 공동체적 유대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가 핵심 과제가 될 것입니다.


Mauricio-chavez



마무리하며..

마르크 오제의 ‘비장소’ 개념은 현대 도시와 건축을 성찰하는 데 있어 중요한 틀을 제공합니다. 

익명성과 표준화로 점철된 공간은 우리의 삶에서 장소적 감각을 희미하게 만들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안에서 관계를 만들고, 기억을 쌓고, 정체성을 찾으려는 존재입니다. 

결국 공간이 단지 구조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야기의 무대’가 될 때, 우리는 그곳에서 ‘누구인지’를 다시 묻고, 다시 대답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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