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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도시와 건축의 장은 더 이상 고정되고 선형적인 구성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과거의 중심-주변, 위계-통제라는 구조를 넘어, 다층적이고 탈중심화된 공간 개념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는 철학의 영역에서 비롯된 사유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대 철학의 혁명적 사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과 유목주의 철학 - 전통적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다양한 연결과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하는 그들의 사상은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 더욱 빛을 발합니다.
본 글에서는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정신분석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의 공동 작업을 중심으로, 그들이 제시한 ‘리좀(Rhizome)’ 개념과 ‘유목적 공간(Nomadic Space)’이 건축과 도시이론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구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적 배경
후기 구조주의 맥락
들뢰즈와 가타리는 푸코, 데리다 등과 함께 후기 구조주의 운동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기존 구조주의의 한계를 넘어 더 역동적이고 유동적인 사고체계를 제시했습니다.
1968년 5월 혁명의 영향
프랑스의 5월 혁명은 두 철학자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과 새로운 사회적 가능성에 대한 탐색은 그들의 핵심 주제가 되었습니다.
전통 철학과의 단절
그들은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의 전통적인 이원론과 위계적 사고를 거부하고, 다양성과 차이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철학 패러다임을 구축했습니다.
주요 저작의 탄생
'안티 오이디푸스'(1972)와 '천 개의 고원'(1980)은 정신분석학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아 현대 철학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리좀의 개념과 특성
뿌리가 아닌, 연결의 은유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Mille Plateaux)』(1980)에서 ‘리좀’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제시합니다. 리좀은 전통적인 서구의 ‘나무형 사고(arborescent thinking)’—즉, 중심에서 가지를 치며 뻗어나가는 위계적 구조—에 반대되는 것으로, 땅속 줄기처럼 어느 지점에서나 다른 지점으로 연결될 수 있는 비위계적이고 수평적인 구조를 말합니다.
이러한 사유는 특정한 중심 없이 복수의 진입점과 연결점을 지닌 지식, 권력, 사회의 네트워크를 설명하는 데 유용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좀적 사고를 통해 고정된 정체성과 구조에 균열을 내며, 탈코드화(deterritorialization)와 재코드화(reterritorialization)의 유동적 과정을 강조합니다.
리좀의 6가지 원리
연결의 원리, 이질성의 원리, 다양체의 원리, 비의미적 단절의 원리, 지도제작의 원리, 전사의 원리가 리좀을 구성합니다. 이 원리들은 모든 점이 다른 모든 점과 연결될 수 있는 네트워크 구조를 형성합니다.
유목적 공간 - 경계 없는 이동과 탈영토화
리좀의 개념과 긴밀히 연결된 또 하나의 사유가 ‘유목성(nomadism)’입니다. 이는 정주농경민의 고정된 시공간 개념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유목민의 사유 방식이 보다 창조적이고 열려 있으며, 중심에 구애받지 않는 공간적 사고를 가능케 한다고 보았습니다.유목적 공간이란 경계와 중심이 뚜렷한 공간이 아닌, 끊임없는 이동과 접속 속에서 형성되는 잠재적인 공간입니다.
정주적 vs 유목적 사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고정된 장소에 머무는 '정주적' 사고방식과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적' 사고방식을 대비시켰습니다. 정주적 사고가 국가, 제도, 법과 같은 고정된 구조를 선호한다면, 유목적 사고는 이동, 변화, 생성을 중시합니다.
평활한 공간과 홈이 패인 공간
유목민이 이동하는 사막이나 초원과 같은 '평활한 공간'(smooth space)은 국가의 통제와 분할이 이루어진 '홈이 패인 공간'(striated space)과 대조됩니다. 평활한 공간에서는 자유로운 이동과 창의적 흐름이 가능합니다.
국가장치에 대한 저항
유목주의는 단순한 이동의 방식이 아니라, 중앙집권적 국가 장치에 대한 철학적 저항의 형태입니다. 고정된 영토와 정체성에 대한 집착 대신, 끊임없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건축과 도시이론에서의 리좀적 전환
건축과 도시계획은 오랫동안 중심축, 구심력적 배열, 위계적 공간 조성이 주요한 원칙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도시의 복잡성, 정보기술의 발달, 사용자 참여의 확대는 리좀적이고 유목적인 공간 구성의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리좀적 도시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통적인 마스터플랜의 단일 중심에서 벗어나, 다양한 프로그램과 기능이 복잡하게 얽히며, 다수의 진입점과 열린 경로를 지닌 도시입니다. 공간은 더 이상 기능적으로 나뉘지 않고, 사용자 간의 관계성과 흐름 속에서 구성됩니다. 이는 하이테크, 생태, 비선형 계획 등 다양한 도시 실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시이론가이자 철학자인 마누엘 델란다(Manuel DeLanda)는 들뢰즈의 영향을 받아, 도시를 고정된 형태가 아닌, 흐름(flow)과 집합체(assemblage)의 동적 시스템으로 이해하며, 이러한 도시적 조건을 ‘리좀적 기계’로 읽어냅니다.
유목성과 건축적 실천
건축에서도 ‘유목적 공간’은 고정된 유형과 사용방식에서 벗어나, 사용자의 이동과 변화, 관계의 재구성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모듈화된 시스템, 확장 가능한 구조, 경계의 해체 등을 통해 구현되며, 하드웨어 중심의 구조에서 소프트웨어적 공간 활용으로의 전환을 유도합니다.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의 후기 작업, 렘 콜하스(Rem Koolhaas)의 파라노이드-크리틱 도시 전략, SANAA의 흐르는 경계감 없는 공간 구성 등은 리좀적 사고와 유목적 공간을 건축적으로 실험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특히, 렘 콜하스는 『S, M, L, XL』(1995)에서 도시를 정보와 이벤트의 축적으로 보며, 고정된 유형이 아닌 프로그램의 흐름으로 공간을 정의하고자 하였습니다.
현대 건축 사례 - 리좀의 공간, 유목의 경험
아래의 세 사례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이 현대 건축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오슬로 오페라하우스 – 스노헤타(Snøhetta)
노르웨이의 건축사무소 스노헤타는 유목적 사고를 도시와 자연, 사용자와 공간 사이의 관계 속에 풀어냅니다. 오슬로 오페라하우스는 경사 지붕이 도심과 바다를 연결하는 공공의 흐름으로 작동하며, 공연장의 경계는 도시의 일부로 확장됩니다. 이는 리좀적 구조가 도시 내에서 ‘열린 플랫폼’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요코하마 국제여객터미널 – FOA
Foreign Office Architects의 요코하마 여객터미널은 전통적인 기능구획을 배제하고, 하나의 유동적이고 연속적인 지형처럼 설계되었습니다. 평면과 단면이 경계 없이 연결되며, 건축은 하나의 리드미컬한 ‘경험의 흐름’으로 재구성됩니다. 이는 유목적 공간의 탈중심성과 사용자의 자유로운 경로 설정을 적극 반영한 결과입니다.
센다이 미디어테크 – 이토 도요
이토 도요의 센다이 미디어테크는 구조적 파이프가 기둥과 기계설비, 수직동선을 통합한 ‘튜브’로 작동하며, 각각의 층은 유연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곳에서의 공간은 고정된 기능보다는 유동성과 연결성을 우선하며, 정보의 흐름, 사람의 움직임, 프로그램의 확장을 수용하는 리좀적 건축입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리좀적 현상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현대 인터넷은 리좀의 완벽한 예시입니다. 중앙 통제 없이 수많은 노드가 서로 연결되어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월드 와이드 웹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예견한 리좀적 구조를 구현합니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사용자들 간의 무수한 연결을 통해 정보와 영향력이 비선형적으로 퍼져나가는 현상을 보여줍니다.
탈중심화된 조직 구조
현대 기업과 단체들 중 많은 곳이 전통적인 위계질서 대신 수평적 네트워크 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직에서는 다양한 팀이 자율적으로 작동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권한과 의사결정이 분산되어 있습니다.
디지털 유목민의 등장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일하는 '디지털 노마드'들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목 개념이 현대적으로 구현된 형태입니다. 이들은 고정된 사무실 대신 전 세계를 이동하며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됩니다.
예술과 문학에서의 리좀과 유목주의
현대 예술과 문학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선형적 내러티브를 거부하는 실험적 문학, 경계와 장르를 넘나드는 현대 미술, 즉흥성과 우연성을 중시하는 현대 음악은 모두 리좀적 사고의 예술적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 형태들은 고정된 의미 대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며, 관객과 작품 사이의 상호작용을 중시합니다.
정치적 함의와 저항의 가능성
소수자 되기의 정치학
지배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소수자 되기'의 혁명적 잠재력
미시정치와 분자혁명
일상 속 작은 저항들이 모여 이루는 변화의 가능성
국가장치에 대한 도전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에 맞서는 리좀적 네트워크의 힘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은 강력한 정치적 함의를 지닙니다. 그들은 거대 권력 구조에 맞서는 '미시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회 변화는 혁명적 사건이 아닌 일상적 실천들의 '분자적' 수준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합니다. 최근의 탈중앙화된 사회 운동들—예를 들어 온라인을 통해 조직되는 시위나 해시태그 캠페인—은 리좀적 저항의 현대적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비판과 한계
리좀 개념의 모호성과 비일관성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 개념은 종종 그 모호함으로 인해 비판받습니다. 구체적 정의보다 은유와 암시에 의존하는 그들의 서술 방식은 실용적 적용을 어렵게 만든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 스스로가 리좀적 글쓰기를 표방하면서도 체계적인 이론 구축을 시도하는 모순이 있다는 비판도 존재합니다.
실천적 적용의 어려움
리좀과 유목주의의 개념은 철학적으로 매력적이지만, 실제 사회 구조와 제도 내에서 이를 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리좀적 조직은 효율성과 책임성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완전한 탈중심화는 자칫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할 위험이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맥락에서의 평가
일부 비평가들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적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연결된다는 관점은 궁극적으로 어떤 가치 판단이나 윤리적 기준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됩니다.
정치적 낙관주의에 대한 의문
리좀적 저항이 실제로 지배 권력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존재합니다. 국가와 자본은 끊임없이 리좀적 움직임을 포섭하고 상품화하는 능력을 보여왔으며, 진정한 변혁적 잠재력이 실현되기는 어렵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결론 - 리좀적 사고의 현대적 의의
복잡성과 네트워크 시대의 리좀 철학
21세기 네트워크 사회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 개념은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 정보의 폭발적 증가, 초연결 사회의 도래는 리좀적 사고가 현실에서 구현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이제 리좀은 단순한 철학적 은유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는 중요한 틀이 되었습니다.
다양체를 위한 미래적 사고의 가능성
리좀 철학은 단일성과 동질성에 대한 맹목적 추구를 거부하고, 다양성과 차이의 가치를 중시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다문화 사회, 정체성의 유동화, 다양한 가치관의 공존이 요구되는 현대 사회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다양체' 개념은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연결을 모색하는 미래 사회의 청사진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실험을 위한 철학적 토대
전통적인 위계질서와 중앙집권적 구조의 한계가 드러나는 현 시점에서, 리좀과 유목주의 개념은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실험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합니다. 분산형 거버넌스, 참여 민주주의, 공유 경제 등 다양한 대안적 모델들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이들의 철학은 단순한 학문적 논의를 넘어, 보다 수평적이고 창의적인 미래 사회를 구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리좀적 사고로서의 건축적 실천
들뢰즈와 가타리가 우리에게 제안한 철학적 사유는 단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 공간의 구성과 경험 방식을 전환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리좀은 건축이 고정된 의미와 목적에서 벗어나, 관계 속에서 재구성되는 네트워크가 되도록 유도하며, 유목적 공간은 사용자의 이동성과 삶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열린 구조를 제안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디지털 기술, 지속 가능한 도시 전략, 사회적 포용이 중요한 현대 도시건축 담론 속에서 새로운 창조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건축은 이제 단순한 형태나 기능의 총합이 아닌, 사유의 확장, 사회의 리좀적 재편에 기여하는 실천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덧붙이며
이 글을 마무리하며 독자 여러분께 질문을 던져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그리고 우리가 설계하는 건축은 중심이 있는가요? 아니면 다양한 흐름과 연결이 가능한 리좀인가요?
리좀적 건축은 단지 트렌드가 아니라, 우리가 마주한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다시 그려보게 합니다. 새로운 사고의 방식이 공간 속에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지, 우리 각자의 삶과 실천 속에서 질문해보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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