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별 공간 인식의 차이 – 동양과 서양이 느끼는 ‘크기’의 건축적 감각

우리가 ‘넓다’ 혹은 ‘좁다’고 느끼는 감각은 단순히 물리적 치수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같은 10평(약 33㎡)의 공간이라도 한국 전통 주택에서는 ‘넓다’고, 유럽의 대저택에서는 ‘작다’고 평가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문화적 배경, 생활 방식, 미적 가치관이 만든 ‘스케일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동양의 여백과 관계 중심 공간관, 서양의 물리적 풍요와 독립성이 만들어내는 건축 문화의 근본적 차이를 탐구합니다. 문화가 어떻게 우리의 공간 인식을 형성하고, 이것이 주거와 건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세요.





뿌리부터 다른 동서양의 공간관

동양 – 관계와 여백의 공간

동양에서는 공간을 '관계'와 '여백'의 측면에서 인식합니다. 공간은 비어있음으로써 의미를 가지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관계와 상호작용이 중요시됩니다. 이는 밀접한 협력이 필요한 벼농사 문화에서 비롯된 집단주의적 가치관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한옥

사랑채와 안채의 기능 분리, 마당을 통한 시선 확장

일본 주택

다다미 크기를 기준으로 한 모듈 설계, 가변형 공간 구성


서양 – 물리적 풍요와 독립성

서양은 공간을 '물리적 풍요'와 '독립성'으로 해석합니다. 개인의 영역과 소유권이 명확히 구분되며, 공간의 물리적 크기와 규모가 중요합니다. 이는 개인의 노력과 독립성을 강조하는 밀농사 문화에서 발전한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반영합니다.

프랑스 살롱(salon)

사교와 접객 중심, 대형 창과 벽난로

영국 타운하우스

거실·서재·다이닝룸의 명확한 구분


농경 방식의 차이는 동서양의 사고방식과 공간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벼농사는 물 관리와 협력이 필수적이어서 촘촘한 사회 구조와 집단적 사고를 발달시켰고, 이는 맥락을 중시하는 공간 인식으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밀농사는 상대적으로 개인 노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독립적이고 분석적인 사고, 그리고 객체 중심의 공간 인식을 형성했습니다.



동양과 서양 철학의 공간 인식 차이

동양 철학의 공간관

고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 철학에서는 세계를 '연속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나의 흐름'으로 인식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공간은 분절되지 않고 서로 연결된 관계의 장으로 이해됩니다.

도교의 '도(道)'와 유교의 '예(禮)'는 모두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중시하며, 이는 공간에 대한 인식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천지만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 장자

전체 맥락

동양 사상은 부분보다 전체, 개체보다 관계에 집중하여 공간을 인식합니다. 이는 맥락 속에서 의미를 찾는 공간 디자인으로 이어집니다. 


서양 철학의 공간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서양 철학은 세계를 '객체와 그 속성'으로 분석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사물의 본질과 속성을 명확히 구분하고 분류하는 논리적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분석적 사고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같은 수학적 체계로 발전하여 공간을 측정 가능한 객관적 대상으로 인식하게 했습니다.

"모든 것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 - 피타고라스

분석적 사고

서양 사상은 공간을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분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는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공간 활용으로 발전했습니다.




전통 한옥 -  자연과 인간의 경계가 모호한 공간

한옥의 마루와 마당은 동양적 공간 인식의 완벽한 구현체입니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모호하고, 자연과 인간의 생활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 처마와 툇마루는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면서도 연결하는 '중간 영역'을 형성
  • 마당은 비어있는 '여백'으로서 다양한 활동과 사회적 관계가 이루어지는 장소
  •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빛은 공간에 깊이와 변화를 부여
  • 자연 소재를 그대로 활용해 인위적인 경계를 최소화

이러한 동양적 공간 인식은 현대 건축에서도 '열린 평면'과 '유동적 공간'의 개념으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주거 방식이 만든 스케일 인식의 차이

동양의 기둥식 목조 건축

동양의 전통 건축은 가벼운 목재를 사용한 기둥식 구조가 특징입니다. 이는 벽보다 기둥을 중심으로 공간을 구성하며, 자연스럽게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 큰 창과 개방적인 문
  • 마루와 툇마루의 중간 영역
  • 유연한 공간 구성
  • 자연과의 조화 중시

사랑채와 안채 – 한국의 복합 스케일

조선시대 상류 주택은 사랑채(외부 접객 공간)와 안채(가족 생활 공간)의 규모와 성격이 달랐습니다. 사랑채는 손님을 맞는 기능 때문에 시각적으로 넓게 설계되었고, 안채는 실용성과 단란함을 중시하여 상대적으로 아담했습니다.

서양의 벽식 벽돌 건축

서양의 전통 건축은 무거운 벽돌이나 석재를 사용한 벽식 구조가 주를 이룹니다. 이로 인해 내부와 외부가 명확히 구분되고, 독립적인 공간 구성이 발달했습니다.

  • 좁고 세로로 긴 창
  • 명확한 내외부 경계
  • 기능적 공간 분할
  • 물리적 견고함 강조

살롱과 ‘확장 공간’의 문화

유럽에서는 한 방이 20㎡ 이상인 경우도 많으며, 천장고 3m 이상이 일반적입니다. 공간의 물리적 크기가 곧 ‘사회적 위신’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같은 면적이라도 심리적으로 작게 느껴집니다.

내면의 스케일과 외면의 스케일

이러한 건축 방식의 차이는 공간 인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동양은 '내면의 스케일'을 발달시켜 물리적으로 작은 공간이라도 관계와 여백을 통해 확장된 공간감을 경험합니다. 반면 서양은 '외면의 스케일'에 집중하여 물리적 크기와 독립성을 통해 공간의 가치를 판단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현대 건축에서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두 문화가 만나 새로운 공간 경험을 창출하는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동서양 공간 인식과 시각주의 연구

미시간 대학의 리처드 니스벳 교수 연구에 따르면, 동양인과 서양인은 같은 장면을 볼 때 주목하는 요소가 다릅니다. 서양인이 중앙의 주요 객체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동양인은 배경과 관계까지 포괄적으로 인식합니다.

시각 인지 실험 결과

  • 서양인은 중앙의 주요 물체에 더 오래 시선을 고정
  • 동양인은 배경과 관계적 요소를 더 자주 탐색
  • 서양인은 물체의 속성과 특징에 집중
  • 동양인은 장면 전체의 맥락과 관계를 중시

"서양인들이 물고기만 보는 동안, 동양인들은 물고기와 수족관을 함께 본다." - 리처드 니스벳

동양 - 복잡한 사회적 맥락

동양 사회의 복잡한 인간관계와 사회적 맥락은 '전체 장면'을 포괄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발달시켰습니다. 이는 여백과 관계성을 중시하는 공간 디자인으로 이어집니다.

서양 - 객체 중심 사고

서양 사회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객체' 자체에 집중하는 사고방식을 발달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명확한 경계와 독립적 공간을 선호하는 건축 스타일이 발전했습니다.



공간 인식의 심리학 -  내면과 외면의 스케일

내면의 스케일 - 동양

동양의 '내면의 스케일'은 물리적 크기보다 공간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경험과 관계에 중점을 둡니다. 작은 공간이라도 여백을 통해 확장된 공간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관계와 맥락 중심
  • 상대적 공간 인식
  • 유기적이고 유동적
  • 자연과의 연속성 중시

외면의 스케일 - 서양

서양의 '외면의 스케일'은 물리적 크기와 독립성을 강조합니다.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공간의 규모와 기능이 중요시됩니다.

  • 객체와 속성 중심
  • 절대적 공간 인식
  • 기하학적이고 정형적
  • 자연과의 대비 강조

공간 인식 심리 실험

여러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동양인과 서양인은 공간의 크기를 판단할 때도 다른 접근 방식을 보입니다. 동양인들은 공간의 크기를 판단할 때 주변 환경과 맥락 정보를 더 많이 반영하는 반면, 서양인들은 독립적인 측정과 비교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마스다와 니스벳(2006)의 연구

이러한 인식 차이는 단순한 문화적 차이를 넘어 우리의 뇌가 공간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 자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는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용자를 위한 공간을 설계할 때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공간 인식 차이

동양의 공간 인식

  • 비어있음(여백)이 의미를 가짐
  •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모호함
  •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
  • 관계와 맥락을 통한 확장
  • 전체론적 시각으로 공간 인식

서양의 공간 인식

  • 채워짐과 존재가 의미를 가짐
  • 내부와 외부의 명확한 구분
  • 자연에 대한 통제와 구분
  • 물리적 크기와 독립성 강조
  • 분석적 시각으로 공간 인식

이러한 차이는 현대 건축과 디자인에서 다양한 접근 방식으로 나타나며, 글로벌 디자인의 시대에 두 관점을 조화롭게 통합하는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대 건축에서의 동서양 공간 인식 적용

동양적 공간 인식의 현대적 적용

현대 건축에서 동양의 공간 인식은 '여백의 미'와 '관계성'을 강조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일본의 미니멀리즘 건축가 안도 타다오와 한국의 승효상은 비움과 여백을 통해 깊이 있는 공간 경험을 창출합니다.

  • 자연광을 활용한 변화하는 공간감
  • 최소한의 요소로 최대한의 표현
  • 자연 요소와의 유기적 연결
  • 명상적이고 정적인 공간 경험

서양적 공간 인식의 현대적 적용

서양의 건축 전통은 현대 건축에서 기능성과 독립성, 기하학적 비례와 장식성으로 이어집니다. 르 코르뷔지에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같은 건축가들은 명확한 공간 구획과 기능적 효율성을 추구했습니다.

  • 기하학적 형태와 명확한 비례
  • 기능에 따른 공간 분할
  • 대담한 구조와 표현적 형태
  •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공간 경험

문화적 융합

현대 건축가들은 동서양의 공간 인식을 융합하여 새로운 공간 경험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개방적이면서도 기능적인, 미니멀하면서도 표현적인 공간이 현대 건축의 큰 흐름입니다.

지속가능성

동양의 자연과의 조화 개념과 서양의 기술적 접근이 만나 지속가능한 건축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에너지 효율을 넘어 인간과 자연, 공간의 관계를 재정의합니다.




한국 현대 주거에서 나타나는 공간 인식 변화

1960-70년대

전통 한옥에서 아파트로의 전환기. 서구식 생활방식 도입으로 공간의 기능적 분할 시작. 여전히 온돌과 같은 전통 요소 유지

1980-90년대

아파트 문화의 정착과 개인 공간의 강화. 서양식 독립성과 개인주의적 공간 분할 증가. 내부와 외부의 명확한 경계

2000-2010년대

대형 아파트 단지와 폐쇄적 커뮤니티 형성. 동시에 커뮤니티 공간과 조경에 대한 관심 증가. 전통과 현대의 절충적 시도

2010년대 이후

공유 주택, 코리빙 등 새로운 주거 형태 등장. 개방성과 관계성을 중시하는 동양적 가치의 현대적 재해석. 지속가능성과 연결된 공간 디자인

열린 마당에서 폐쇄적 공간으로

전통 한옥의 '열린 마당'과 '여백'의 공간은 현대 아파트의 '폐쇄적 공간'으로 변화했습니다. 효율성과 기능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동양적 공간 인식의 많은 부분이 서구화되었습니다.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는 물리적 독립성과 개인 공간을 강조하는 서양적 공간 관념을 반영하지만, 내부 공간 구성에서는 여전히 한국적 생활 방식의 영향이 나타납니다.

관계성의 회복 시도

최근의 주거 트렌드는 '커뮤니티 공간'과 '공유 공간'의 확대를 통해 동양적 관계성을 현대적 방식으로 회복하려는 시도를 보여줍니다. 코리빙(Co-living), 쉐어하우스 등의 새로운 주거 형태는 개인의 독립성과 공동체적 관계성을 균형 있게 조합합니다.

또한 아파트 단지 내 조경과 커뮤니티 시설의 확대는 현대적 맥락에서 '마을'의 개념을 재해석하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문화가 빚어낸 공간 인식의 다양성과 미래

철학적 차이의 이해

동서양의 공간 인식 차이는 단순한 크기의 차이가 아닌 '관계'와 '독립성'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수천 년간 축적된 문화적 특성이 공간 디자인에 반영된 결과입니다.

융합과 재해석

현대 사회와 건축은 동서양의 시각을 융합하여 더 풍부하고 유연한 공간 경험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미니멀리즘, 열린 평면, 자연과의 연결성 등의 동양적 요소와 기능성, 효율성, 기술적 혁신 등의 서양적 요소가 조화롭게 결합됩니다.

한국적 공존

한국 현대 주거는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공간 감각이 공존하는 독특한 문화적 산물입니다. 빠른 현대화 과정에서 서양적 요소를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전통적 가치를 재해석하며 독자적인 공간 문화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미래 공간의 방향

앞으로의 공간 디자인은 문화적 배경과 사용자의 다양한 인식 방식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지속가능성, 포용성, 유연성을 갖춘 공간은 동서양의 지혜를 모두 수용하며 인간과 환경의 조화로운 관계를 구축할 것입니다.


"진정한 공간의 아름다움은 문화적 경계를 넘어 인간의 경험과 감성에 깊이 닿을 때 완성된다." 

 



마치며 – ‘크기’의 감각은 문화의 거울

동양과 서양의 공간 인식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건축이나 디자인의 영역을 넘어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더 풍요롭고 의미 있는 공간 경험을 창출하고,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을 디자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공간 크기 인식은 단순한 면적 차이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가치관의 반영입니다.

오늘날 글로벌 건축 환경에서 중요한 것은, 이 차이를 이해하고 새로운 스케일 언어를 만드는 것입니다. 건축가는 이제 ‘넓음’과 ‘작음’을 절대값이 아닌,  문화적 감각의 변수로 다루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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