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에서 건축으로 – 볼륨·절제·균형이 설계 개념이 되는 조형적 건축

건축은 “살아가는 공간”을 만드는 행위이고, 조각은 “형태를 통해 감각을 자극하는 예술”입니다. 하지만 두 영역은 늘 경계를 넘나들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가이자 건축가였듯,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을 “빛 아래 놓인 형태들의 조합”이라 정의했습니다.

그렇다면 조각적 개념, 즉 볼륨·절제·균형은 단순한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건축 설계 개념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그 가능성과 실제 사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건축과 조각, 그 경계 위에서

건축과 조각은 오랫동안 공간과 형태를 다루는 별개의 예술 분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이 두 영역 사이의 경계는 점차 흐려지고 있습니다. 건축가들은 더 이상 단순한 기능적 공간 구성에 머무르지 않고, 조각가의 시선으로 형태와 공간을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조각적 건축(Sculptural Architecture)

조각적 건축(Sculptural Architecture)은 단순히 독특한 외관을 가진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공간을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고, 그 덩어리를 깎고, 다듬고, 변형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공간 경험을 창출하는 접근 방식입니다. 이러한 접근법은 건축을 더 이상 직선과 직각의 집합체가 아닌, 유기적이고 유동적인 조형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합니다.



볼륨 – 공간을 형성하는 덩어리

조각의 볼륨 개념

조각에서 볼륨은 단순한 ‘덩어리감’을 넘어, 빛과 그림자가 만나는 면과 면 사이의 긴장으로 정의됩니다. 로댕의 조각이 생생한 이유도, 인체 볼륨을 통해 감정과 움직임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건축에서의 볼륨 설계

건축에서 볼륨은 공간의 매스를 정의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는 단순한 박스 형태지만, 그 볼륨을 들어 올려 ‘띄운 건축’을 완성했습니다.

  • 안도 타다오의 교회 건축은 콘크리트 벽이라는 볼륨 자체가 신성한 공간의 분위기를 만듭니다.

볼륨은 건축에서 공간의 밀도와 비어 있음의 리듬을 설계하는 핵심 언어입니다.


자하 하디드는 유기적 곡면과 역동적인 볼륨을 통해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단순한 형태가 아닌, 움직임과 흐름을 담은 공간 조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볼륨의 경험

볼륨은 사용자가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공간의 확장과 압축, 빛의 유입과 차단, 시선의 유도 등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조율합니다.


건축에서 볼륨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를 넘어 공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요소입니다. 조각적 접근을 통해 볼륨을 재해석하면, 건물은 더 이상 정적인 구조물이 아닌 역동적인 공간 경험의 매개체가 됩니다. 자하 하디드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유동적인 볼륨은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사용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합니다.





볼륨이 공간을 춤추게 하다

자하 하디드의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는 유동적인 볼륨을 통해 건축이 어떻게 조각적 표현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입니다. 곡선의 연속적인 흐름은 마치 거대한 조각품처럼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나는 건축을 거대한 조각으로 봅니다. 그것은 형태와 공간, 빛과 그림자의 복합체이며, 사람들이 경험하고 느끼는 공간입니다." - 자하 하디드

 

이 건물에서 볼륨은 단순히 공간을 감싸는 외피가 아닌, 공간 자체를 정의하고 방문자의 움직임을 유도하는 적극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 유기적인 곡면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과 상호작용하며 하루 종일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절제 –  덜어냄의 미학

절제는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여 본질에 집중하는 조형 원리입니다. 건축에서 절제는 장식과 과잉을 거부하고, 공간과 형태의 순수한 관계를 추구합니다. 이는 단순함을 위한 단순함이 아닌, 더 깊은 공간적 경험을 위한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조각에서의 절제

조각가 도날드 저드(Donald Judd)의 미니멀리즘은 절제의 미학을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불필요한 장식을 모두 제거하고, 형태와 재료만 남겨 본질에 집중했습니다.

건축에서의 절제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Less is more(적을수록 더 풍부하다)”라는 말처럼, 절제는 건축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 미니멀 하우스의 간결한 입면,

  • 빛과 그림자만으로 드러나는 공간의 깊이,

  • 절제된 디테일을 통해 드러나는 구조적 아름다움.

이 모든 것은 조각의 절제가 건축 설계에 녹아든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안도 타다오는 절제의 미학을 가장 잘 구현하는 건축가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노출 콘크리트 벽면과 최소한의 개구부는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제거한 후 남은 순수한 공간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절제는 오히려 공간에 깊이와 감성을 더합니다.


"나는 공간을 비워냄으로써 채웁니다. 빈 공간이 빛을 담고, 감정을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안도 타다오

절제된 디자인은 시각적 소음을 제거하고 본질에 집중하게 합니다. 이는 공간이 가진 고유한 특성과 사용자의 경험을 더욱 강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안도 타다오의 '빛의 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콘크리트 벽과 십자가 형태의 빛만으로도 강렬한 영적 경험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균형 – 힘의 조화로 세워지는 건축

건축에서 균형은 단순히 물리적 안정성을 넘어 시각적, 경험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조각적 접근을 통해 균형의 개념을 확장하면, 건축은 더욱 풍부한 공간 경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조각의 균형

조각에서 균형은 물리적 안정과 심리적 안정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인체 조각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비례와 균형 덕분입니다.

건축에서의 균형

건축은 말 그대로 중력을 이기는 균형 위에 서 있습니다. 캔틸레버 구조, 비대칭 매스의 배치, 다양한 볼륨 조합은 결국 균형이라는 구조적 원리 덕분에 성립합니다.
예: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은 자연과 건축의 균형을 이루며, 캔틸레버 구조로 대담한 안정감을 보여줍니다.

  • 산티아고 칼라트라바의 조형적 건축은 구조적 균형이 곧 예술적 형상이 되는 사례입니다.

공간 경험에서 긴장감과 안정감의 균형은 건축의 감성적 효과를 결정합니다. 균형 잡힌 공간은 사용자에게 안정감을 주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경험을 제공합니다.


헤르초그 & 드 뫼롱의 '베이징 국립 경기장(새둥지)'은 균형의 개념을 혁신적으로 해석한 사례입니다. 얽히고설킨 강철 구조물은 시각적으로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교하게 계산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무질서 속의 질서, 복잡함 속의 단순함이라는 균형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건축 설계 개념으로서의 조각

조각적 사고는 건축 설계 과정에 새로운 차원을 더합니다. 단순한 평면과 입면의 조합으로 시작하는 전통적인 설계 방식과 달리, 조각적 접근은 3차원적 덩어리(볼륨)에서 시작하여 이를 깎고, 다듬고, 변형하는 과정을 통해 공간을 형성합니다.

볼륨 구상

전체 매스를 3차원적 덩어리로 인식하고 공간 관계를 설정합니다.

절제적 조형

필요한 공간을 위해 덩어리를 깎고 비워내는 과정입니다.

균형 조율

전체 구성이 조화롭게 작동하도록 시각적, 구조적 균형을 맞춥니다.

빛과 그림자

조각적 형태가 만드는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고려합니다.

움직임 고려

사용자의 움직임과 경험 시퀀스를 조각적 형태에 반영합니다.


이러한 조각적 접근은 설계 초기 단계에서부터 공간과 형태, 빛과 그림자, 재료와 질감의 통합적 고려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는 단순히 외관의 조형성을 넘어 건물 전체의 공간적, 경험적 질을 향상시키는 강력한 설계 방법론이 될 수 있습니다.





자하 하디드 -  혁신적 조각적 건축

유동적 조형 언어를 건축으로 확장, 곡선과 흐름을 통해 도시 속 조각 같은 건축을 창조.

광저우 오페라 하우스

자하 하디드의 '광저우 오페라 하우스'는 조각적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건물은 마치 강가에 부드럽게 놓인 조약돌처럼 유기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건축과 조각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버립니다.

하디드는 이 프로젝트에서 복잡한 곡면 볼륨을 사용하면서도 절제된 디테일로 전체적인 순수함을 유지했습니다. 외부의 유동적인 형태는 내부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방문자들에게 마치 거대한 조각 작품 속을 걷는 듯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나는 공간을 유동적이고 역동적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건물 안에서 움직이는 방식 자체가 공간 경험의 중요한 부분이 되도록 했습니다." - 자하 하디드

이 건물의 구조적 혁신은 조각적 형태를 현실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복잡한 곡면을 구현하기 위해 첨단 디지털 설계 도구와 시공 기술이 동원되었으며, 이는 건축이 조각적 표현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헤르초그 & 드 뫼롱 -  재료와 형태의 조각적 실험

재료의 조각적 활용

헤르초그 & 드 뫼롱은 재료 자체를 조각적 요소로 활용합니다. '테이트 모던 스위치 하우스'의 벽돌 패턴은 단순한 마감재가 아닌, 빛과 그림자를 조율하는 조각적 장치로 기능합니다. 벽돌 사이의 틈새는 낮에는 내부로 빛을 끌어들이고, 밤에는 내부의 빛이 외부로 새어나가게 하여 건물 전체가 거대한 랜턴처럼 빛납니다.

형태의 절제된 변형

'티엘레파스' 프로젝트에서 그들은 단순한 직육면체 볼륨을 미묘하게 비틀고 변형하여 긴장감 있는 공간을 창출했습니다. 이 건물은 멀리서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경험하면 복잡한 공간적 관계와 시각적 효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절제된 조각적 접근이 건축에 어떤 깊이를 더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균형과 긴장의 조화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의 작품은 시각적 무게와 구조적 안정성 사이의 균형을 섬세하게 조율합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매스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착시 효과는 정교한 구조적 계산과 조형적 직관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이러한 균형 잡힌 형태는 보는 이에게 강렬한 시각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헤르초그 & 드 뫼롱의 작업은 재료와 형태에 대한 실험적 접근을 통해 건축의 조각적 가능성을 확장합니다. 그들의 건물은 단순히 아름다운 형태를 넘어, 재료의 본질과 구축 방식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조각적 표현의 결과물입니다.



안도 타다오 -  빛과 공간을 조각하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은 '비움'을 통한 조각적 접근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그의 작품에서 빈 공간은 단순한 여백이 아닌, 적극적으로 설계된 조각적 요소입니다. 노출 콘크리트의 차가운 질감과 자연광의 따뜻함이 만나 만들어내는 대비는 그의 공간에 깊은 감성을 부여합니다.

'빛의 교회'에서 십자가 형태로 뚫린 개구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닌, 공간 전체를 변화시키는 조각적 제스처입니다. 이 작은 개입을 통해 콘크리트 상자는 영적 경험의 장소로 변모합니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빛은 정적인 건축 공간에 움직임과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나는 콘크리트라는 재료를 통해 빛을 조각합니다. 빛은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공간은 빛에 의해 살아납니다." - 안도 타다오

안도의 건축에서 볼륨은 극도로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공간적 경험은 놀라울 정도로 풍부합니다. 이는 절제와 균형이라는 조각적 원리가 건축에 적용될 때 얼마나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건축은 조각이 될 수 있을까?

조각과 건축의 관계는 단순한 형태적 유사성을 넘어, 공간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근본적인 방식에 관한 질문입니다.

형태를 넘어선 철학

진정한 조각적 건축은 단순히 유기적 형태나 비정형 외관을 가진 건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간을 물질로 인식하고, 그 물질을 조형하여 새로운 경험을 창출하는 설계 철학입니다.

새로운 의미의 창출

볼륨, 절제, 균형의 조형 원리는 건축에 적용될 때 단순한 미학적 가치를 넘어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는 건물이 단순한 기능적 용기가 아닌, 문화적, 감성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가 될 수 있게 합니다.

미래의 가능성

디지털 설계 도구와 첨단 건축 기술의 발전은 조각적 개념의 실현 가능성을 계속 확장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건축은 조각적 사고와 기술적 혁신이 결합하여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공간 경험을 창출할 것입니다.


건축이 조각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예'이면서 동시에 '아니오'입니다. 건축은 조각과 같은 조형 원리를 공유하지만, 실제 사용자가 경험하고 생활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조각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차이점이 건축에 조각적 접근을 적용할 때 더욱 흥미로운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조각적 설계, 건축의 새로운 언어

우리는 건축과 조각의 경계를 탐색하며, 볼륨, 절제, 균형이라는 조형 원리가 어떻게 건축 설계의 개념적 토대가 될 수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조각적 접근은 단순히 외관의 형태적 특징을 넘어, 공간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근본적인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풍부한 표현 언어

자하 하디드, 헤르초그 & 드 뫼롱, 안도 타다오와 같은 건축가들의 작품은 조각적 사고가 건축에 얼마나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지 보여줍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볼륨을 다루고, 절제를 실천하며, 균형을 탐구합니다.

"건축은 거주할 수 있는 조각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과 경험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예술입니다."

조각적 사고 = 창조적 상상력

조각적 설계는 건축가에게 새로운 창조적 언어를 제공합니다. 이는 건물을 더 이상 기능적 요구사항의 단순한 해결책이 아닌, 공간과 형태, 빛과 그림자, 재료와 질감의 복합적 관계를 통해 인간 경험을 풍요롭게 하는 매체로 인식하게 합니다.


당신의 다음 프로젝트에서 조각적 사고를 적용해 보세요. 공간을 단순한 평면이 아닌 3차원적 덩어리로 인식하고, 그 덩어리를 조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건축은 조각이 될 수 있을까? 그 답은 당신의 창조적 상상력에 달려 있습니다.





마치며 –  건축은 조각이 될 수 있다

조각은 공간을 점유하고, 건축은 공간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그 본질은 형태를 통해 인간의 감각과 정서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습니다.

볼륨, 절제, 균형은 조각가의 언어이자 건축가의 언어입니다. 결국 건축은 단순히 기능적 구조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조각, 체험하는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건축 설계 개념은 더욱 조형적으로 확장될 것이며, 건축가는 도시를 설계하는 동시에 거대한 조각을 빚는 예술가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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